“글이 너무 많아서 못 읽겠어요” 긴 글만 보면 숨이 가빠오고 쓰러질 거 같다는 사람들. 짧은 글을 선호하는 그들에게 시를 내밀면 또 다시 탄식 섞인 목소리를 쏟아낸다. 느낌이 좋긴 한데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단다. 모호한 걸 피하려 드는 사람들의 기질은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양성된 것이기도 하다. 삶에 항상 정답이 있는 건 아니건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린 입장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 받는다. 그 정점에는 잔인한 질문이라 할 수 있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가 있다. 특정 입장을 취했다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얼버무렸다가는 ‘회색분자’ 소리를 듣기에 딱이다. 학창시절 나의 미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험 점수를 좌지우지했던 것 또한 정답이다. 수긍할 수 없다면 일단 외우고 본다.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면서 점수를 획득해야 모범생이 될 수 있다.장기간의 교육과 더불어 문학에 정답을 강요(?)하게끔 만드는 요인으로 뒤틀린 지난 역사를 꼽고 싶다. 부인하고 싶은 시기인 일제강점기, 우린 우리와 다른 이들을 ‘적’이라 칭하고 배척하는 걸 그 시기를 올곧게 살아낸 스스로에 대한 정당성 부여로 여겨왔다. 무엇을 해석해도 민족주의, 독립 지향이어야만 했는데 문학이라 하여 예외일 리 없었다. 목적을 띠고 쓰여진 글도 물론 있긴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거대한 생명, 우주 등을 노래한 작품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같은 잣대를 드리우다 보니 문학의 지평이 축소됐다. 한용운의 시를 보며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떠올리는 건 발칙하다는 암묵적 분위기에 수긍하다 보면 감수성은 무뎌진다. 시인 이상의 이해 불가능한 시로부터 식민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의 자화상만을 읽어내려 들다 보면 머리가 아플 것이다. 색다른 상상력을 발휘해 가며 다시금 시를 접했다. 고령의 저자가 펼쳐놓은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와 내가 과연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맞는가를 확인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같은 작품을 이토록 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니, 다양성이 주는 즐거움이라는 걸 이제껏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하니 살짝 억울함을 느끼기도 했다. 일례로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시 중 하나인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읽으며 나를 포함한 대다수는 밀려오는 근대 문명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학창시절 그리 배운 탓이 가장 클 것이요, 배움을 의심 않고 곧이곧대로 수용한 우리 자신의 탓도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시로부터 관계론적인 의미를 읽어낸다. 흔히 나비라 하면 꽃을 저절로 떠올린다. 시인은 이미 견고해 보이는 관계를 허물고 새로운 관계 형성을 시도한다. 꽃을 대신한 바다, 바다 위에서 날갯짓 하는 나비. 어딘지 모르게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시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비를 어린 나비라 설명함으로써 한 단계 높은 상상력을 덧입힐 수 있는 여지를 번다. 어린 나비는 순수하다. 그 순수함에 걸맞게 바다는 파도로 요동 쳐서는 곤란하다. 바람 따라 일렁이는 것은 모든 걸 삼키는 파도가 아닌 청무밭이어야만 했다. 마치 도미노가 순차적으로 쓰러지듯이 하나둘씩 조합에 있어서의 균형을 추구해 나가고 있는 시의 흐름을 이 책이 아니었더라면 난 알지 못했지 싶다. 의미에 눈뜨기 위해서는 명확한 것에만 집중해서는 아니 된다. “시는 정답을 감추어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침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 그리고 상호 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을 찾는 작업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모호한 건 질색이다. 정해진 것을 잘 좇아서 ‘모범생’ 소리를 들었고, 나름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대신 재미는 없었다. 시를 읽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 싶다. 시험에서 정답을 잘 고를 수 있을진 모르나 일상에서 접하는 시로부터 아무런 재미나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말이 그리 맛과 멋이 없는 언어가 아닌데, 이 좋은 언어를 참 멋없고 맛없게 사용하고 있는 내 자신이 많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30년간 문학을 가르쳐온 이어령 교수의 시 문학수업!
일상적 삶의 벽을 무너뜨리는 놀라움, 언어의 심층에 싸인 시의 비밀을 밝혀내다!
이어령 교수는 「우상의 파괴」라는 파격적인 글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한 후, 60년 동안 글을 쓰고 가르치기를 멈추지 않은 이 시대 멘토들의 멘토이며, 학자들의 스승이다. 이 책은 30여 년간 대학 강단에서 문학을 가르쳐온 그가 대중을 위해 펼치는 시 문학수업이다. 이 책은 그저 시에 대한 주관적 감상평을 나열한 뻔한 해설서가 아니다. 한국 문학 비평의 신기원을 열었던 이어령 교수는 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시인의 전기적 배경에 치우쳐 시를 오독해온 우리에게 시어 하나하나의 깊은 의미를 일깨워주며, 문학 텍스트 속에 숨겨진 상징을 기호학으로 분석함으로써 일상의 평범한 언어에 감추어진 시의 아름다운 비밀을 파헤쳐 보여준다.
책을 펴내며 _6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시의 숨은 공간 찾기_12
1부
진달래꽃-김소월, ‘사랑’은 언제나 ‘지금’_32
춘설(春雪)-정지용, 봄의 詩는 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_42
광야-이육사, 천지의 여백으로 남아 있는 ‘비결정적’ 공간_50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오직 침묵으로 웃음으로_58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봄과 여름 사이에서 피어나는 경계의 꽃_65
깃발-유치환, 더 높은 곳을 향한 안타까운 몽상_72
2부
나그네-박목월, 시가 왜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_80
향수(鄕愁)-정지용, 다채로운 두운과 모운이 연주하는 황홀한 음악상자-_87
사슴-노천명,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생명의 알몸뚱이_96
저녁에-김광섭,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_102
청포도-이육사, 하늘의 공간과 전설의 시간을 먹다_109
군말-한용운, 미로는 시를 요구하고 시는 또한 미로를 필요로 한다_116
3부
화사(花蛇)-서정주, 욕망의 착종과 모순의 뜨거운 피로부터_124
해-박두진, 해의 조련사_132
오감도 詩 제1호-이상, 느낌의 방식에서 인식의 방식으로_140
그 날이 오면-심훈, 한의 종소리와 신바람의 북소리_148
외인촌-김광균,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에 숨어 있는 시적 공간_156
승무(僧舞)-조지훈, 하늘의 별빛을 땅의 귀또리 소리로 옮기는 일_164
4부
가을의 기도-김현승, 죽음의 자리에 다다르는 삶의 사계절_174
추일서정-김광균, 일상적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언어_182
서시-윤동주, ‘별을 노래하는 마음’의 시론_189
자화상-윤동주, 상징계와 현실계의 나와의 조우_196
국화 옆에서-서정주, 만물이 교감하고 조응하는 그 한순간_204
바다와 나비-김기림, 시적 상상력으로 채집한 언어의 표본실_212
5부
The Last Train-오장환, 막차를 보낸 식민지의 시인_222
파초-김동명, ‘너 속의 나’, ‘나 속의 너’를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_230
나의 침실로-이상화, 부름으로서의 시_238
웃은 죄-김동환, 사랑의 밀어 없는 사랑의 서사시_248
귀고(歸故)-유치환, 출생의 모태를 향해서 끝없이 역류하는 시간_255
풀-김수영, 무한한 변화가 잠재된 초원의 시학_262
새-박남수, 시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_271
덧붙이기
시에 대하여_280
인덱스_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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