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첫사랑을 했는지 아리송하다. 첫사랑다운 첫사랑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처음 데이트를 했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처음 연애를 했다. 그러나 첫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첫사랑이라고 할 만한 사랑은 대학 동아리 후배랑 했다. 만나자마자 불꽃 튀는 사랑은 아니었지만 서로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연애는 서툴기 그지없었다.
첫사랑에서, 너나 나나 사랑이, 아니 그 사랑의 표현 형식인 연애가,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지 배웠어. 너와 내가 만나 하나 혹은 우리가 되는 게 아니라, 너도 없애 버리고, 나도 없애 버리고, 그래서 마치 연애라는 괴물 뱃속에서 허우적대는 듯한 우울함에 시달렸어. 헛된 시간이 아니었을 거야. 너나 나나 다시 연애를 할 때는 좀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를 없애지 않으면서 적당히, 적당히.
하지만 그런 지극히 이성적인 사랑이, 그러니까 계산적인 사랑이, 우리들의 처음 연애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처음 연애는 정말이지 처음 하는 연애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순결하고 아름다웠던 게 아닐까? (196 - 197쪽)
사범학교에 진학한 미순과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러 나선 ‘농민’의 사랑(「징검돌」), 노가다 십장의 딸 순영과 일꾼 ‘천재’의 사랑(「삶은 달걀」), 명절 고향 가는 길에 만난 공순이 고운이와 공돌이 ‘용감’이의 사랑(「고향 가는 길」), ‘곰탱’의 연애편지를 전달하는 동무 기열이도 ‘이해’를 사랑하게 되어 복잡해진 사랑(「삼각관계」), 제방이 무너져 비를 피해 달아나다 꽃 피운 사랑(「집중호우」), 상고에 다니는 ‘상큼’이와 농고에 다니는 배천이의 사랑(「소나기눈」), 두 살 많은 누나와 수덕사로 놀러갔던 ‘판돈’과 규숙의 사랑(「등산」), 조직폭력배 청년의 애인인 문학동아리 누나와 ‘무현’의 사랑(「고백」), 시인지망생 청년과 여고생 ‘낙미’의 사랑(「방갈로」), 17살 다방 레지 ‘옥얀’과 당구장 사장 청년의 사랑(「편안한 잠」), 광장공포증이 있는 남학생과 공부에 중독된 ‘가희’의 사랑(「월드컵」), 팔방미인 ‘자유’와 문학소년 ‘홍규’의 사랑(「헤어지자, 우리」)이 모두 서툰 내 첫사랑과 닮아 있다.
이들의 사랑은, 그 표현 방식인 처음 연애는, 서툴고 순결하며 아름답다. 애틋하고 안타까우며 끝내 어긋나버리고 만다. 그래서 첫사랑은, 지나가버린 사랑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련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지나간 시대를 배경으로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바로 그 까닭 때문에, 여기에 실린 첫사랑은, 처음 연애는, 흘러간 노래 같다. 어른이 지나간 사랑 노래를 부르며 청소년들에게 들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다. 요즘 청소년들은 자기들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고 하고 싶은데.
천상 이야기꾼 김종광이 6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십대들의 첫사랑에 얽힌 시대별 이야기를 옴니버스 소설로 묶어내었다. 4.19 혁명과 전태일 분신 사건, 전교조 사태, 87년 태풍 셀마, 88 서울올림픽, 91년 대규모 학생 데모, IMF, 2002 월드컵 등등 청소년이 주도적으로 행동했거나 아니면 청소년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십대들의 변화상과 십대들의 사랑이야기를 맛깔스럽게 그려냈다.
이 책은 시대별 1318 사랑의 변천사를 해학적으로 다루었다. 1960년대엔 누구나 몰래 풋풋한 사모의 감정을 키워나갔다면 요즘은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우리 사귈래? 라고 당당히 물어보는 게 일상적인 행동이 되었다. 처음 연애 를 통해 사회가 변하면서 아이들의 애정관이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특유의 능청스럽고 힘 있는 서사로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유치하고,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엽기발랄하게 작가만의 색다른 시선으로 첫사랑을 표현하였다.
처음 연애 에는 시대별 청소년의 정의와 청소년들의 연애 장소, 연애의 매개체, 수단 등등이 꽤 상세하고 꼼꼼하게 서술되어 있다. 단편들 뒤에 수록된 작가가 풀어놓는 1318 사랑의 역사 역시 이 책의 또다른 별미다.
징검돌
삶은 달걀
고향 가는 길
삼각관계
집중호우
소나기눈
등산
고백
방갈로
편안한 잠
월드컵
헤어지자, 우리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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